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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에서 국회의원 도전까지"

임진기 미디어리서치 수석정책연구위원

조경이 | 기사입력 2024/04/19 [18:35]

"바텐더에서 국회의원 도전까지"

임진기 미디어리서치 수석정책연구위원

조경이 | 입력 : 2024/04/19 [18:35]

 

▲ 월드휴먼브리지 아프리카 르완다 농업지원 프로젝트    

 

 

  

평생에 이력서를 쓰며 이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려 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함께 일하고 싶다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한단계 한단계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경기 성남중원 국민의힘 예비후보로 22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던 임진기(50) 예비후보자의 이야기다.

 

임진기 현 미디어리서치 수석정책연구위원은 어머니 고향은 대구이고 아버지 고향은 여수라며 아버지가 하셨던 건설업이 잘 되셔서 돈을 많이 버셨지만, 서울로 올라와 새롭게 도전한 사업이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쯤 망했고 다시 안양으로 내려가 살다가 여수로 전학을 갔다. 6학년 때 다시 사업이 일어나는 듯 했는데 군대 갈 시점에 집이 다시 크게 망했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부터 달동네, 판잣집까지 10대 시절에 다 경험해 봤다. 제대하고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가 혼자 살라고 하셨고 두 남동생들도 모두 다 흩어져서 살았다고 회상했다.

 

군 전역 후 20대에 어머니가 주신 80만원을 손에 쥐고 서울로 올라와 숙대 반지하 하숙집에서 그의 청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어떻게 뭘 하면서 살까 좌절하고 우울할 여유도 없었다. 그보다 당장 다음 달 낼 월세가 걱정이었다. 고졸이라 직업을 구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고 단란주점에서 일하면 팁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곳을 너무 싫어해서 단란주점 등의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홍대라는 곳을 알게 됐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됐다.

 

그는 카페에서 칵테일도 팔았는데 사장님이 칵테일을 만드는 일을 처음 시켰다그때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그런 생각보다 나중에 여자친구, 아내가 생기면 칵테일을 해주면 되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그의 첫 직업은 바텐더가 됐다.

 

칵테일 제조뿐만 아니라 카페의 모든 허드렛일부터 물품 관리까지 자신의 가게처럼 챙기고 관리하면서 그는 사장으로부터 총괄매니저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나는 여기서 오래 일할 수 없다. 대학 시험을 봐야한다며서 아르바이트직으로 총괄매니저 역할까지 도맡아 했다.

 

생면부지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서 밤낮없이 일했지만 가족과 떨어져지내며 힘든 마음이 찾아올 때면 교회를 찾아갔다. 그는 고등학교 때 고모가 항상 저를 데리고 교회에 가셨다그래서 제가 커서도 어디를 가면 꼭 교회를 정해놓고 다녔다. 당시에는 남동생들도 다 흩어져서 살고 경제적으로 다 힘든 상황이었다. 홍대에서 대학생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불안함이 많이 찾아왔다. 복잡한 마음으로 청파동교회를 혼자 찾아가서 매주 다녔다. 그러던 중 특별부흥집회가 교회에 있었다. 첫날 밤 집회 때부터 갑자기 내 마음에 큰 울림이 찾아왔다. 참을 수 없는 영적 진동이 왔고 예배도 시작하기 전에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내 마음이 깃털처럼 너무 가벼워지고 행복해졌다. 내 삶의 환경이나 상황은 변한 게 없지만 마음이 너무 행복했다. 그 순간이 내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20대 때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는 하나님 자녀로 열등의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세상에서 당당한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자는 다짐도 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 앞에서 하듯이 하자는 철학도 그때 갖게 됐다.

 

 

▲ 월드휴먼브리지 남미볼리비아 직업기술학교 코이카 지원사업    

 

▲ 양육미혼모 지원사업    

 

 

  

카페 아르바이트를 2년 정도 하고 그만두려고 하자 갑자기 카페 사장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건설회사 사장이라며 그 회사에 취직을 권유했다. 그렇게 갑자기 건설회사에 취직이 돼 현장총괄로 책임자가 됐고 그곳에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제 부모님의 인생을 봐도 그렇고 나의 여정을 보더라도 계획대로 인생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다만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누군가 나를 좋게 보는 인연이 생기고 다른 일자리 혹은 다른 꿈들이 이어지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건설회사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인테리어에 관심이 생겼다. 인테리어 중에서도 제일 복잡한 파트가 부엌 가구. 그 경험을 좀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우연히 한샘 채용박람회 옆을 지나게 됐다. 그는 박람회 부스에서 건설회사 경험이 있다고 한샘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초대졸자 이상만 된다고 안된다고 했다. 잘 할 수 있다고 지원하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했더니 우선 명함을 달라고 나중에 연락을 드린다고 했는데 정말 합격이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뒤에 한샘 대리님이 있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보며 독특한 놈이 다 있네하며 취업을 시켜주신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한샘에 취업한 그는 부엌가구 영업을 시작하게 됐다. 캐드 설계도 하고 판매도 하며 열심히 뛰어다녀 입사 6개월여 만에 전국 판매 탑 세일즈 멤버에 들어갔다. 1년의 경험을 쌓은 후, 한 지인의 무역관련 물류회사에 입사해 몇 년 동안 일을 했다. 이후 독립해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초반엔 수익이 작았지, 열심히 영업하며 여러 거래처가 생기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됐다.

 

 

 

 

 

 

 

돈을 버는 비지니스에서 그는 어떻게 NGO 전문가가 됐을까. 시작점은 바로 아내였다. 그는 당시 사랑의 교회에 다닐 때였는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아내도 만났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피아니스트였다.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클래식 공연기획사를 세워서 귀국 독주회를 열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금호아트홀에서 아내 첫 독주회를 열었다. 아내만 하고 공연기획사를 접기가 아쉬웠는데 음악잡지를 통해 하피스트 박나나 교수님을 알게 됐고 그분에게 연락해서 서울대 출신의 제자분들과 친구분들을 소개받아 클래식 공연 기획을 다 했다. 중간중간에 아티스트 분들에게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 지원금 연결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대 교수님들 사이에서 탁월한 기획사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클래식음악기획사를 연 그는 안양의 한 개척교회를 다니던 중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고 싶다는 마음에 꿈꾸는 새들의 합창공연을 기획하게 된다. 그는 학교밖 청소년들을 위한 클래식연주회를 열어주고 싶었다주변에 학교밖 청소년들을 어떻게 찾지 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하게 됐고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를 비롯해 쉼터 청소년들을 모았다. 150 여 명이 모였는데 아이들 간식도 먹여야 해서 크리스피도너츠 본사, 코카콜라 본사 등에 전화해서 지원을 요청했다. 세계적인 음악가들도 초청했고 아이들도 너무 좋아했다. 정서적으로 불완전한 아이들이 위로를 받고 변화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꿈꾸는 새들의 합창3년째 공연을 앞두고 한국타이어에서 후원을 해주었는데 기부금영수증을 끊어달라는 것이었다. 기부금영수증을 발급해주려면 단체가 법정기부금단체 또는 지정기부금단체에 해당되어야 한다. 그는 관련 정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사단법인 나눔과 기쁨이라는 법인를 알게 돼 기부금영수증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나눔과 기쁨설립자인 서경석 목사를 처음 만났고 도움을 받았다. 서 목사와의 대화 가운데 나눔과 기쁨단체 안에도 문화관련 담당자 필요하다며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게 됐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난 후에 돈 버는 일에 대해 여러 마음속 갈등이 있었다그 가운데 기도에 올인하며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경석 목사님과 만남과 대화 가운데 마음에 생기가 넘쳤고 꿈꾸는 새들의 합창3년째 마지막으로 올리고 30대 중반 서경석 목사님과 NGO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맡은 일이 있으면 최선의 최선을 다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스스로 알아가고 배워가며 하나씩 헤쳐나가는 열정적인 일꾼인 만큼 그는 나눔과 기쁨에서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신나게 일을 했다. 그런 와중에 정부프로젝트로 큰 기금을 따내는 성과도 있었다.

 

그는 당시 만나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나눔과 기쁨을 하면서 누군가를 도와줄 때 내가 너무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도움을 줬는데 행복해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나눔과 기쁨을 하며 1년이 지났을 때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을 만나게 됐고 그 가운데 만나교회가 모체가 된 사단법인 월드휴먼브리지를 세우는 일에 시작을 맡아서 하게 됐다고 전했다.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식    

  

▲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아내와 함께    

 

  

10여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 NGO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교회에서 NGO를 한다고 하니 장로님들의 반대가 컸다. 하지만 김병삼 목사님께서는 선교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부분에 깨어계셨고 그렇게 월드휴먼브리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저는 그것과 더불어 한국교회가 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연합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때 연합과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나교회의 월드휴먼브리지가 아닌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함께 연대하기를 소망했고 지방 곳곳의 교회를 다니며 월드휴먼브리지 지역본부를 세워나가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월드휴먼브리지 사무국장이었던 그는 전국에 16개의 지역 본부를 세웠고 그렇게 7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그 후에도 ()휴먼앤휴먼인터내셔널 사무총장으로 3년 동안 일했고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해 목회학을 깊이 있게 공부했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22년도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본 기독교싱크 탱크의 필요성이라는 연구 주제로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공공신학(선교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 성남시 미국산업시찰 엔비디아 방문    

 

  

NGO 사무총장으로 전국을 누비며 선한 일들을 도모했던 그가 어떻게 갑자기 성남시 정책특보로, 이후에는 22대 국회의원선거 예비후보로 출마를 선언하는 정치인의 여정을 걷기 시작한 것일까.

 

그는 30대 중반에 우연히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영국사회에서 노예제도를 해방시킨 그 시작점에 있는 분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법과 제도, 즉 정치가 잘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NGO를 오래 했지만 법 하나가 바뀌면 지금 하는 나눔도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더 가치 있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면서 법과 제도가 너무 중요한데 어떤 철학을 기반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는 성경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싱크탱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오래 갖고 있던 중에 NGO를 하며 알게 된 정치인들 가운데 신상진 시장님 선거캠프에 합류해 정책특보로, 국회의원 출마까지 오게 됐다고 털어놨다.

 

 

▲ 성남시장 비서실 정책특보 시절    

 

 

  

그는 국민의힘 성남중원 예비후보로 중원구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을 만났다. 새벽부터 밤까지 선거 활동 기간 내내 중원구 시민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하게, 조금 더 마음 편하게 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어메이징 중원이라는 개발프로젝트로 선거 공약을 펼쳤다. 하지만 본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모든 선거가 끝난 후에 만난 그는 여전히 생기가 넘쳐 있었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가능성을 높이 보며 다른 캠프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그는 모두 고사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다. 성남시 중원구 시민들을 위한 자리일까 아닐까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었다.

 

 

 

 

그는 선거활동을 펼치며 시장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정말 삶이 팍팍하고, 웃음을 잃은 분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시고 잘되기를 응원한다고 해주셨다. 그분들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받은 사랑을 꼭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 중원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하나님을 믿은 후부터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이끄시는 대로 기도하고 움직인다. 다만 다음세대 건강한 정치인들을 잘 길러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정치를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선한 가치 가운데 잘 세워갈 수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고 싶다. 정치개혁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원구를 위한 일도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간의 인생 여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을 고백했다. 첫째는 고난은 인생의 축복이고, 고난은 하나님께서 포장한 축복이라는 것”, 둘째는 인생에서 경험하고 살아온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놀라운 예비하심이라는 것”, 셋째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진실한 노력, 인내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러한 부분을 얻게 되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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