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이었다. 문화방송국 성우 1기로 뽑힌 배우 최선자는 어떻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됐을까. “제 고향이 전라북도 전주예요. 저희 언니가 전주 KBS에서 아나운서를 하고 있었어요. 언니를 따라 방송국도 가보고, 마이크도 접해봤었죠.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서 전북대학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서 우연히 개교 기념으로 큰 연극을 준비하는데 제가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됐죠.”
우연을 가장한 은혜였다. 당시 KBS에서 전국 대학 방송극 경연 대회를 열어 시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제2회 연기상을 받았다. 그리고 형부로부터 MBC 문화방송이 생긴다는 소식을 접했다. “거기서 성우를 뽑는데, 언니랑 형부가 저에게 노잣돈을 쥐여주고 시험을 보고 오라고 기차를 태워 보냈어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떠밀리듯 서울로 가게 됐죠.”
당시 TV가 가정에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라디오로 연극을 접하던 때였다. 그녀는 아나운서 언니 덕분에 마이크가 두렵지 않았고 성우 1기가 될 수 있었다. “그때 방송국에 차범석 선생님이라고 우리나라 표현극의 거장이었던 분이 계신데, 그분이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온몸으로 연기해야 미래가 있다고 알려주셨고, 트레이닝을 시켜주셨어요.” 그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으로 연기해야 하는 TV의 시대가 열렸다.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배우 최선자라는 이름이 만방에 퍼지는 것을 경험했다. “모든 게 다 채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어요.” 그러던 중, 방송 개국 당선 작가를 만나 결혼하게 됐고, 남편은 남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우리 세상 같았어요. 저는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남편은 인터뷰하자는 곳이 쇄도할 정도로 글을 잘 썼어요. 아이들도 좋은 학교에서 학업을 하고 있었죠. 그렇게 안정적인 가정을 갖게 됐는데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5~6년을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지만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계속 기침하고 숨이 가빠져서 숨을 못 쉬는 상황이 생기고, 그러면 병원에 가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있기를 반복했어요. 또 한 번 퇴원하는 날, 이제는 산소호흡기를 1분만 떼도 자가호흡이 불가능하니, 산소호흡기를 달고 퇴원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됐죠.”
매일이 고비였다. 어린 시절 잠깐 교회에 다녔던 기억과 고등학교를 미션스쿨로 다니면서 성경 보고 찬양했던 시간들이 스쳤다.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지인 작가가 연락을 취했다. “3박 4일 동안 좋은 곳에 동행했으면 좋겠다고 수련회에 참석을 권하더라고요. 그런데 산소호흡기를 달고 나만 의지하는 남편이 있어 감히 엄두를 못 냈죠. 근데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큰 기대는 없이 남편에게 말했는데 남편이 다녀오라고 하더라고요.”
자녀들도 자신들이 아빠를 보살필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지인과 가게 된 그곳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새가 나는 모든 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느껴졌죠. 부드러운 은혜의 여정이었지만 그녀의 목에 턱하고 걸리는 게 있었다. 남편이었다.
매일 생사를 오가는 그에게 복음이 필요했다. “워낙 자존심도 강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이라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중환자실 생활을 하던 중, 끊임없이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은 남편이 그녀에게 메모지와 볼펜을 요구했다.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사님과 전도사님께서 나를 위해 오늘부터 금식하셨대. 너무 고맙다고 전해줘’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난 어느 날, 남편은 그녀에게 ‘요즘 몸무게를 잴 때면 내 무게를 재는 것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은 죄의 중량을 달아보는 느낌이 든다’, ‘엑스레이를 찍을 때면 저 깊숙이 숨겨놓은 죄까지 하나님이 찍어 보여주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전도사님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들으며 천국에 갔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공허함이 사라진 그녀는 동행의 충만함으로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배우로서, 문화 속에서 살다 보니 하나님이 문화 안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같은 직종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모아 뮤지컬, 연극, 간증 집회를 열었죠.”
‘미리암’이라는 극단을 만들어 하나님을 전하는 문화선교를 시작했다. 복음의 뮤지컬을 15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올렸다. 비행깃값을 지불하지 못 할 뻔한 위기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고, 5천 석 가까이 되는 큰 극장을 꽉 채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공연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어요. 늘 더 좋은 것으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요. 지금 천국 가도 부끄러움 없게 매일 회개하고 나누고 웃고 감사할 수 있길 바라요.” 그녀는 지는 노을을 보며 천국을 그려본다고 잔잔한 마음을 고백했다. 삶의 모든 것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녀의 삶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저작권자 ⓒ THE N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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